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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매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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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6,188회 작성일 13-02-16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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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매재 가는 길

환경교육 활동가. 손윤한

가을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차창으로 보이는 넓은 논엔 미소가 좋은 허수아비가 나락을 먹기 위해 몰려 든 참새와 장난질을 합니다. 가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남한강이 손을 흔들며 따라옵니다. 울긋불긋 물들기 시작한 나무들이 겨울채비에 부산한 와중에도 잠시인사를 건네줍니다. 국도를 벗어나 좁은 지방도를 달립니다. 작은 하천 옆에는 아직 추수를 하지 않은 논이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습니다. 참 좋은 가을입니다.

설매재, 눈이 오는 날 매화가 그윽한 향을 퍼트리며 꽃망울을 터트렸다하여 이름 붙여진 곳, 유명산과 머리를 맞대고 있는 양평에 있는 곳입니다. 억새가 바다처럼 장관을 이루는 고개 마루입니다.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설매재를 보고 싶었습니다. 초행이라 가는 길이 만만치 않습니다. 백주에 은행을 털고 계시던 할머니의 도움이 없었다면 골짜기에서 많이 헤맸을 겁니다. 오전에 볼 일을 마치고 나선 길이라 근처까지 도착하니 점심때가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마당에 예쁜 과꽃과 분홍색과 하얀색의 끈끈이대나물이 심어진 국수집에서 간단하게 허기를 채웁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마당에 앉아 가을볕을 즐깁니다. 메리골드 사이사이로 벌새처럼 보이는 황라꼬리박각시 한 마리가 부지런히 꿀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 옆에 신비한 보랏빛의 용담이 피어있습니다. 저는 용담만 보면 와신상담이라는 고사가 생각납니다. 전쟁에서 당한 굴욕을 되갚기 위해 땔나무에 누워 자고 쓸개를 매달아 맛보며 자신의 의지를 불태웠다는 고사, 쓸개가 얼마나 쓰면 이런 고사가 생겼을까요? 그런데 쓰다고 하는 곰쓸개(웅담)보다 더 쓴 맛을 내는 들꽃이 있습니다. 바로 용담입니다. 얼마나 쓰면 이름도 용의 쓸개, 즉 용담이라고 지었을까요? 용담을 뒤로 하고 우선 설매재 자연휴양림 안으로 들어갑니다. 저는 당연히 설매재가 자연휴양림 안에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더군요. 설매재는 더 올라가야 한답니다. 휴양림을 나와 다시 언덕길로 차를 몹니다. 꽤 가파른 경사길입니다. 길 양편에서 쑥부쟁이와 산국이 활짝 웃으며 반겨줍니다. 쑥을 캐던 불쟁이(대장장이) 딸이 환생한 꽃인 쑥부쟁이는 전설 때문인지 연한 보랏빛 꽃이 애틋해 보입니다. 지금 제철인 산국은 감국과 자주 혼동되는 꽃입니다. 제 구별법은 먹어보는 것입니다. 맛을 봐서 쓰면 산국, 달면 감국입니다. 감국은 말 그대로 맛이 달디 단 국화입니다. 차별 없는 사랑을 꿈꾸던 백정의 넋이 변해서 된 누리장나무의 열매가 가을 햇살에 반짝입니다. 흑진주를 머금은 빨간 불가사리 같습니다.

설매재 입구에 내려 산길을 따라 걷습니다. 꽃이 지고 난 자리마다 빨간 열매를 달고 있는 참나물과 초록색 열매를 잔뜩 매달고 있는 토현삼이 길옆에서 반겨줍니다. 바람이 불 때 마다 노랗게 변해가는 생강나무 잎이 손을 흔듭니다. 짙은 분홍색 꽃향유에는 붕붕붕 벌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새끼꿩의비름도 열매 맺은 연둣빛 머리를 흔들어 줍니다. 붉게 물든 당단풍나무와 갈색으로 곱게 옷을 차려입은 느티나무가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며 산길을 오르는데 갑자기 눈앞이 탁 트이며 하얀 눈밭이 펼쳐집니다. 정말 눈밭입니다.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눈뿐입니다. 순간 착각을 합니다. 지금이 겨울인가 하는,......드디어 억새 군락지에 다다른 것입니다.

눈앞에 펼쳐진 억새들의 장관에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바람에 서걱대는 억새 잎은 으악새처럼 슬피 우는 것 같습니다.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하는 노랫말이 절로 떠오릅니다. 키를 훌쩍 넘긴 억새 사이를 ‘왕의 남자’에 나오는 광대들처럼 덩실덩실 춤을 추며 돌아다닙니다. 이쪽으로 가도 억새, 저쪽으로 가도 억새, 여기를 봐도 억새, 저기를 봐도 억새,...... 온통 억새뿐입니다. 정신없이 억새밭은 헤매고 다니다보니 어느새 설매재 정상에 다다릅니다. 설매재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은 정말 장관입니다. 바람 따라 이리저리 물결치는 억새들의 군무, 파란 가을 하늘을 무대 삼아 펼쳐지는 억새들의 군무에 온통 마음을 빼앗깁니다. 나도 미친놈처럼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한참을 그렇게 혼을 놓고 놀았더니 마음이 맑아지더군요. ‘그래 뭐 있어? 이렇게 사는 거지.’ 설매재 정상에서 나를 봅니다. 물결치는 억새 사이에서 흔들렸던 나를 봅니다. ‘그래 흔들려도 결코 떠나서는 안 돼. 저 억새들처럼,......’

내려오는 길, 올라 갈 땐 보이지 않았던 패랭이들이 억새 사이사이에 곱게 피어있는 것이 눈에 띕니다. 온통 억새에 마음을 빼앗겨서 패랭이들이 짙은 분홍색 꽃을 피우고 바람에 살랑살랑 손짓하는 것도 몰랐던 겁니다. 허리를 숙여 패랭이를 들여다봅니다, 참 예쁜 꽃입니다. 개화 시기만 맞는다면 비싼 로열티를 주고 수입하는 카네이션을 대체할 수 있는 우리네 들꽃입니다.

오늘 설매재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에 가을이 물결치고 있더군요. 하얀 가을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춤을 추고 있더군요. 겨울은 아니었지만 설매재에서 눈을 봤습니다. 온 산을 뒤덮고 있는 하얀 억새 눈을 봤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매화가 피어있더군요. 짙은 분홍빛의 패랭이라는 매화가,......그리고 그곳에서 봤습니다. 내 자신을,...... 설매재에서 ‘나’를 봤습니다.

2007년 10월. 환경일보